시작은 도피, 그러나 결국 책임감 - 오픈소스 번역 기여에 대한 기억
2013년 12월, 당시 초등학교 졸업 직전이었던 시기 저는 처음으로 오픈소스 번역 기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컴퓨터 관련 활동도 종료되었고, 아직은 나이가 어리다보니 어려운 부분도 많아 안드로이드 앱 개발 도서를 가지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무언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싶었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오픈소스 번역 기여를 나름대로의 도피처로 설정하여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보면 도피의 개념을 잘못 아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도피는 맞습니다. 정면으로 개발 공부에 돌입하지 않고, 개발 지식을 번역하며 익히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반대가 되어야 맞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그때는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한창 학창시절이다보니, 영어 공부에 대한 압박에도 약간은 방패삼아 쓸 수 있었을 거란 기대도 있었네요. 실제로 방패로 역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그거고,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공부는 또 다른 문제인거죠. 도움이 전혀 안 되었나 하면 그건 아닙니다만.
아무튼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그것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의욕도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Mozilla 재단의 각종 제품, 도움말 번역 활동에 더해 한때 안드로이드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꽤 유명했던 Dolphin Browser의 일부 번역 담당, Mageia라는 OpenMandriva 기반 OS의 일부 한국어 번역 등 10개가 넘는 제품을 오가며 번역 활동을 심심할 때마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그렇다고 많은 양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공부를 잘 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러다보니, 컴퓨터를 할 시간을 많이 확보했던 것은 아니라서요
GitHub Pages가 무료라는 사실에 2014년 즈음 계정을 생성하기는 했습니다만, 당시에는 Git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SVN이니, 하는 다른 버전 관리 시스템은 더더욱 어려워서 손도 대지 못했던지라 Transifex나 Crowdin이라는 브라우저에서의 번역을 돕는 서비스를 이용할 때만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예외가 있다면 Dolphin 브라우저 번역이었는데, 이건 Excel 혹은 Google Spreadsheet 기반이라서 조금 더 쉬웠습니다. 아마도 Mozilla 도움말이나 MDN 번역을 오래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쉽게 번역할 수 있는 도구가 같이 제공되어서였을 겁니다. 처음 할 때는 Mozilla의 제품 번역 전용 도구인 Pontoon이 없어서 직접 SVN을 이용해 번역 작업에 참여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조금도 참여하지 못했거든요.
문제는 이렇게 번역에 매달리면서 다른 공부를 소홀히 하다보니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제대로 공부해나가지 못했습니다. 2013년 마지막으로 배웠던 것이 Python이었는데, 아무리 기반이 2.7이어서 3.0 이후와는 다르다곤 해도 의지가 있다면 공부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웹에 관심이 많았던 중학생 때 django나 Flask 같은 프레임워크도 나와서 원한다면 웹 개발 쪽으로 찾아볼 수도 있었는데 그런 기회를 별로 관심있어 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개발에서 조금씩 멀어져갈 때마다, 아직은 오픈소스 쪽에서 비록 번역이지만 기여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방패'삼아 정당성을 확보하고 미뤄왔습니다. 이렇게 하니, 결국 안드로이드 앱 개발 책을 개정판으로 다시 구입하고도 2년 넘게 쓰지 않고 묵혀두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번역 활동을 계속 하려고 해도 그 제품을 제가 써야 번역을 할 때 참고해가면서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2016년을 기점으로 하나 둘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201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다시 개발 공부를 시작하면서 시간을 그리 많이 할애할 수 없었던 탓이 크기도 했습니다. 당시 다시 컴퓨터 관련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더는 등한시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있었습니다. 정작 같은 반 급우들을 보면 그런 의식이 있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만은 다들 학생부 종합 전형으로 학교를 잘 간 것을 보니 전혀 없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신 관련 활동에 다시 참여했다는 이유로 겨우 약간의 협조를 더 얻어 시간적인 여유가 이전보다는 생겼습니다만, 아무래도 첫 해에는 잊어버린 것도 많고 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날렸습니다. 제대로 무언가를 해볼 수 있었던 건 2018년부터였던 것 같네요.
그러나 2019년 즈음에 수능을 치루면서 다시 도피를 했던 저는 Pontoon에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게 됩니다. 당시 정말 많은 번역을 승인 여부와 상관 없이 제안했으니, 성적이 정말 필요했다면 번역을 쉬었어야 하는데 그 정도로 제게 간절하진 않았나봅니다. 지금의 저라면 뜯어 말리고 싶습니다만, 이미 지나간 일인걸요. 그 이후에도 시간이 나는 만큼은 번역을 하기로 결심해서 2020년부터는 매해 10건 이상 도움말 문서라도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조금 발전하고 싶은 부분도 있어서 다른 프로젝트인 Brackets의 한국어 웹사이트 번역도 맡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Git을 이용한 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기피하다가 그래도 Git을 이용한 번역에 도전할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돌연 웹사이트를 포크해서 번역 작업을 한 후 PR을 열었습니다. 그동안은 아주 간단하게 번역을 시작했었기 때문에 잘 몰랐는데, Contributor License Agreement (CLA), 그러니까 기여자 라이선스 동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급히 동의한 후 다시 리뷰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제가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음을 통감하여 오픈소스 컨트리뷰션 아카데미에 지원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신청서에 부족한 점도 많았고 오랜 기간 번역을 한 반면 실제 개발 실력은 다른 곳에 기여할 만한 정도가 되지 못하여 애매한 위치에 있어서 그런지 결국 멘티에서 탈락했습니다. 아무래도 Git을 별로 사용해보지 못한 것으로 말을 꺼내기에는, GitHub 계정 생성일부터가 2014년인 것도 영향이 있었을지도요.
다사다난했던 2022년 상반기가 지날 때 즈음 Mozilla 도움말 번역을 재개하여 10개 이상의 문서를 번역하고 며칠이 지난 새벽, 제가 번역한 문서를 검토해주셨다는 메일이 수 통 왔습니다. 마침 잠이 안 와서 아직 검토되지 않은 문서는 검토 중이신 걸까, 싶은 마음에 잠시 들어가봤는데, 이전까지는 본 적 없는 '리뷰'라는 버튼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버그인가 싶어서 Bugzilla에 보고할 준비를 하려다가 한국어 번역팀 웹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리뷰어로 등록되어 있어서 상당히 놀랐습니다. 다른 리뷰어 분들만 해도 100건이 넘는 문서 번역은 기본으로 하시는 분들이셔서 제가 좀 더 무거운 짐을 같이 짊어져도 되는지 두려워졌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리뷰어로 남아있는 모습을 보아,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아직은 검토를 요청하는 분들이 보이지 않아서 알아서 번역하고 알아서 승인하고 있습니다만, 되도록이면 스스로 승인하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번역을 승인하면서 갱신이 필요한, 혹은 번역이 필요한 문서들이 잘 개선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실질적으로 리뷰어는 처음이라 많이 떨리고, 도피로 시작한 이 번역 기여의 끝은 어디인가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개인적인 공부는 놓지 않으면서 저 스스로가 번역은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길 바래봅니다. 지나친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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